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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9일 북한은 핵실험에 성공했다. 용처와 존재 이유가 무엇이든, 핵무기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럽고 신경 쓰인다. 우리가 한 순간도 평화를 갈망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것은 이 땅에 온전한 평화가 한 순간도 없었다는 뜻이다. 입 열면 누구나 평화를 말했지만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평화에 대한 언설은 가고, 평화, 그것이 오면 좋겠다. 세상에 굳이 마지막 말 한 마디가 필요하다면, 토마스 머튼의 외침을 들어라. 원제는 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쯤으로 읽힐 만하나 우리 독자 입에 착 달라붙으라고 『머튼의 평화론』으로 편하게 불렀다. (원제는 책 곳곳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므로 헷갈릴 일 없다.)

이 책의 원고는 1962년 4월에 탈고되었고 머튼은 1968년 12월에 죽었다. 이 피울음 같은 유언장이 어쩌다 40여 년 후에야 세상 빛을 보게 되었는지는 짐 포리스트의 서문에 다 나온다. 사연인즉, 당시 머튼이 소속되어 있던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돔 가브리엘 총아빠스가 출간을 금했기 때문이었다. 머튼이 짐 포리스트에게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관한 한 침묵을 강요 당하고 있다”고 분기탱천하여 편지 쓴 것도 그 즈음이었다. 수도자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더 자세한 사정이 궁금한 분들은 포리스트의 서문에 기대면 되고, 놀라운 것은 역자 조효제도 말했듯이 한 세대 이전 글이 “오늘날에도 그 적합성과 생신生新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머튼의 예언자적 통찰과 혜안이 시대를 넘나드는 것을 보고 대니얼 엘스버그는 이 책의 내용이 “내일 신문 헤드라인보다 더 시의적절하다”고 평하기도 했지만, 이를 뒤집으면, 한세월 흘러 본들 우리 사는 세상 꼴이 예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반공’이 거去하고 ‘대테러’가 래來하였다는 사실만 빼면 당시 머튼이 보고, 듣고, 우려하고, 분노한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다 맞아들어간다. 후르시초프와 케네디에게 타당한 말이 부시와 김정일에게도 타당하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역으로, 이 서글픔이야말로 우리가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정치가가 아니었다. 가톨릭 수도승이요 영성가였다. 그는 침묵과 기도와 명상을 통해 세상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맑으니 더러운 것들이 더 잘 보였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거침없이 썼다. 1960년대, 냉전의 삭풍 속에서 그는 “대량살상무기의 비인도성, 일방주의적 행동의 위험성과 다자주의적 해결의 필요성, 무력한 국제기구 유엔의 한계를 꿰뚫어보았고 선제공격의 논리 뒤에 숨어 있는 위선과 전도된 공포를 맹렬히 고발하고 비판했다”. 그 고백적 비판과 성찰의 전면에 예외 없이 자국 정부와 자국민의 무지, 억측, 오만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수도승이자 미국 시민 토마스 머튼의 양심이었다.

역자의 눈을 빌려 이 책의 가치와 의미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9·11 사태 이후 미국이 취하고 있는 대테러 전략과 그에 편승하여 일부 보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십자군 전쟁론과 문명 충돌론을 은근히 비호하고 부추기는 경향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해야 할지를 예언자처럼 가르친다. 이 와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거론하는 정당한 전쟁론을 신학적·윤리적·정치적으로 분석·비판한다. 전쟁과 폭력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인 정당한 전쟁론은 ‘논리적으로’ 합당하고 설득력 있는 윤리적 잣대를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논의에 대해 머튼은 크게 두 갈래 비판을 제시한다.

첫째, 정당한 전쟁론은 ‘책상머리’ 이론이며 신학자·윤리학자들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공론空論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전쟁이 발발해 서로가 죽고 죽이는 와중에서 미리 정한 윤리적 한계 내에서 꼭 필요한 만큼의 폭력만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은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설령 백보를 양보해서 정당한 전쟁이 특정한 상황하에서 용인될 수 있다 하더라도 현대전의 맥락에서 정당한 전쟁 이론은 이미 그 적실성을 잃었다는 지적이다. 전투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공격의 일상화, 특히 전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핵폭탄의 위협 등으로 인해 이제 더 이상 정교하고 제한적인 방어 전쟁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머튼의 통렬한 가르침은 작금의 한반도 상황을 둘러싸고 일각에서 제기하는 군사적 제재, 선제공격, 전쟁불사론 등의 무책임한 주장에 대해 정문일침의 각성을 촉구한다.

머튼은 폭력과 전쟁의 비판에만 머물지 않고 평화를 위한 구체적 행동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와 비폭력 평화주의의 역사적 연원과 현대적 의의를 자세히 다룬다. 그렇다고 머튼 신부가 낭만적으로 무조건적인 비폭력 평화주의를 설파하는 것은 아니다. 뜻이 아무리 좋더라도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주장에 대해서는 적절한 비판을 가할 만큼 그의 논법은 신중하고 지혜롭다. 머튼 신부는 대화와 상호 협상을 통해 적대세력 간의 신뢰 구축과 평화체제 수립이 가능하며 그것을 지향할 특별한 윤리적 책무가 그리스도인에게 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도발적 언동과 감정적 흥분에 흔들리지 말고 인내와 이해의 바탕 위에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조처를 취하기 시작할 때 그 어떤 적대세력 간에도 평화가 수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머튼 신부는 특히 수도자·성직자들이 현세의 일에 대해 예민하게 귀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고, 세상의 쇄신을 위해 분명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수도자가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전반적 쇄신은 위험에 처할 것이요 완전히 불모의 상태가 될지도 모릅니다”라고 호소한다. 바로 이 말이 머튼이 이 땅의 모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깨어 있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간곡히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평화를 목 놓아 갈망하는 사람, 그리고 만약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전쟁을 속으로, 은근히,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서문

1. 평화는 종교의 책임
2. 우리가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가?
3. 죽음의 무도
4.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가꾸는 사람들
5. 오리게네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쟁론
6. 마키아벨리의 유산
7. 현대전의 정의
8. 냉전의 종교적 문제
9. 신학자와 국방
10. 평화를 위한 행동
11. 동과 서를 넘어서
12. 도덕적 수동성과 악마적 능동성
13. 과학자와 핵전쟁
14. 빨갱이냐 죽음이냐?
15. 세계적 위기와 그리스도인의 관점
16.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국방
17. 그리스도인의 선택






지은이 : 토마스 머턴 (Thomas Merton)

1915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화가였던 영국 태생의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아홉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1938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컬럼비아 대학과 성 보나벤투라 대학강단에 섰으며 1941년 켄터키 주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봉쇄 수도원에 들어갔다. 서원을 준비하면서 십자가의 성요한의 영성에 심취하여 『잠언과 영적권고』를 거듭 묵상하고 기도 했다.

1948년 『칠층산』을 시작으로 『가장 완전한 기도』,『명상이란 무엇인가』등 70여 권의 책을 출간하여 20세기 가톨릭 영성 작가로 자리 잡았다. 1963년 종교와 관상기도 연구에 대한 기여로 평화상을 비롯해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1968년 태국 방콕에서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칠 때까지 수사, 영성작가, 사회정의 수호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옮긴이 :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로 옥스퍼드 대학교와 런던 정경대학(LSE)에서 공부했다. 저서에 Human Rights and Civic Activism in Korea가,편.역서에 <세계 인권 사상사><전 지구적 변환>등이 있다. 현재 하버드 대학교 법대 펠로우로 연구 중이다.